리더쉽

이예 - 일본 통상기

'김용환' 2011. 12. 14. 13:30



나의 멘토는 나에게 '포지션보다 사명에 헌신하라'고 하신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오늘 클리앙( & 오유) 을 보는데, '이예'라는 굉장히 좋은 분이 계셔서, 잘 정리하고자 메모한다. 사람을 섬기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이 있었다.

출처는 "오늘의 유머"싸이트.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todaybest&table=humorbest&no=416986)



 






 





출처 : 위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98%88_(1373%EB%85%84)

생애1397년 1월 31일 3천명의 왜구들이 울주포[2]에 침입하여 군수 이은(李殷) 등을 사로잡아 돌아갔다.[3] 다른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데 비해 이예는 자진해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보필해 해적들을 감복시켰다. 후일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1397년 2월 이예는 군수와 함께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이예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아전의 역(役)을 면제하고 벼슬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예는 중인 계층의 아전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 양반으로서의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8세 때 해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조정에 청해 1400년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갔으나 찾지 못했다.[출처 필요]

처음으로 사절의 책임을 맡은 것은 1401년(태종1년)으로, 보빙사로 일기도에 파견되었다. 1406년 일본 회례관(日本回禮官)으로 파견되어, 납치되었던 남녀 7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4] 1416년 1월 27일 유구국[5]으로 가서, 왜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으로 팔려간 백성을 데려오기 위해 유구국으로 파견되었다.[6] 그는 유구국에서 44인을 데리고, 같은 해 7월 23일 귀국하였다. [7]

1418년 4월 24일 태종 18년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사망하자, 조의 사절로 대마도에 파견되어 쌀, 콩, 종이를 부의하여 그의 충성을 후사하였다. 종정무는 치세 기산 도적을 금제하여,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이예를 파견한 것이다. [8]

“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 ”
—《세종실록》, 세종8년에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는 이예에게 임금이 갓과 신을 하사하며 당부하는 말
 

1443년 세종 25년 왜적이 변방에 도적질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으므로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려 하니, 이예가 자청하여 대마도 체찰사(對馬島體察使)로 파견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사행(使行)이었다.

28세 나던 1400년에서 71세 나던 1443년까지 44년간 40여회 일본[9]에 임금의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 중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사행(使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10].

조선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이예가 쇄환해온 조선인 포로의 수가 66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편집] 업적일본인의 조선 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양국의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의 명으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조선에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였으며 일본식 상가제도의 시행을 건의하는 등 양국 문화 및 경제의 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한 바 있다.





멋진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