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hristianpost.com/church/Megachurches/2008/09/osteen-arms-thousands-with-hope-not-doctrine-07/index.html
조엘 오스틴에 대한 여론이 많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독특하다.
그에 대한 기사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최근에 낸 책 Become a Better you 에서 나온 것처럼 그의 부르심은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싹을 심는 것이다. 부르심이란 각자에게 있고, 그 것을 향해 달려가는 데, 종교적 편견에 따라서 각자 믿음의 편견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부르심에 대해서 왜 이런 부분은 없느냐, 왜 너는 이상하냐 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편견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모든 모습을 우리가 다 얘기할 수 없고, 겨우 몇 부분만 알 뿐 인데, 그의 부르심은 그것일 뿐이다. 그는 그저 그 부르심을 받는 데로 갈 뿐이다.
존 밀의 자유론에는 종교적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했다. 즉,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당시 유대인이 알던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모욕했다라는 죄목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신앙의 잣대, 양심의 잣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고, 상대방에 대해서 왜 그러하지 않는지, 왜 저렇게 행동하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판단하고,상처를 준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부르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한 데 말이다.
희망의 싹을 주는 사람에게 그렇게 이상하다고 말하는데, 왜 수만명의 사람들이 와서 조엘 오스틴의 설교를 들을 까 생각했다. 조이스 마이스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영적전쟁, 치유, 중보기도에 대해서 설교하시는 분과 달리 초급적인 신앙에 대해서 설교하는 데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돈을 주고 설교를 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단순한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나의 감정, 나의 이성은 끌리지 못함이다. 바로 이것에 대한 첫번째 소망이 아닌가 싶다. 나의 나됨부터 가장 먼저 만져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이 없는데, 교리와 사도바울의 교회론 기도론이 먹혀들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필요가 있다. 그 필요를 채워주는데, 그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면, 분명 그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부르심을 가지고 그 부르심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것 같다.
비록 그가 영적 전쟁, 중보기도, 예배에 대해서 깊숙히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희망과 복음과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안에 있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강조하지 않는가??
나를 향해서 말하는 것 같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얘기하면서 그들의 첫번째 사귐,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을 강조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판단은 성도들이 하는 것이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려면, 신앙인으로서 판단을 하고 거기에 맞는 훈련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방을 비판하고 시험하기 보다는 그저 부르심을 인정하고 먼저 자신을 모습을 돌이켜보고 자신의 편견부터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귀를 적는다..
"I'm called to plant a seed of hope in people's hearts," as he wrote in his latest book, Become a Better You.